스님 법문
-
[자비도량참법기도] 2월10일 자비도량참법기도 회향 법문
가섭스님 2022-02-10
마하반야바라밀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자비도량참법 오늘 다 마친 거죠. 다 마쳤습니다. 애쓰셨습니다. 저도 총무스님 전화를 받고 입재하는 날부터 유튜브로 참여를 했습니다. 전체 다 하지는 못하고요. 근무하면서 책상 앞에 핸드폰 켜놓고. 오늘은 자비도량참법, 임인년 새해를 열면서 자비도량참법 기도를 했는데요. 자비도량참법(慈悲道場懺法)이라고 하는 게 자비하고 도량하고 참법하고 이렇게 세 가지가 결합해 가지고 이루어진 건데, 참법이라고 하는 것이 참회할 때 참자, 그 참은 지나온 세월 동안에, 내가 무시겁래(無始劫來) 동안에 신구의 삼업으로 지었던 잘못들을 뉘우치고 본인의 마음을 정비하는 거예요. 비유하건대 여기 들어오니까 괜찮은데, 밖에 서 있으니까, 추운 데 서 있으니까 숨 쉴 때마다 안경이 자꾸 서리가 껴요. 성에가, 김이 껴서 잘 앞이 안 보여요. 성에가 안경에 끼는데 따뜻한 데 들어오면은 딱 사라지잖아요. 추운 데 가면은 또 성에가 끼고. 참법이라고 하는 거가 이 안경에 성에 낀 것을 다 사라지게 하는 거와 같은 거에요. 비유하건대 너무 요란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적으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참법이 돼야 된다는 거죠. 형의상학적인 거나 비현실적인 거나 또 신비로운 게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참법이 돼야 해요. 그런데 그 참법이 자비도량을 하는 참법이거든요. 자비도량이라고 하는 거는 원래 내가 갖추고 있는 도량이에요. 그 자비도량이라고 내가 갖추고 있는 도량인데, 입김에 성에가 끼듯이 그동안에 자비도량을 자꾸 흐리는, 자비도량을 흩트리는 그런 행위로 인해서 자비도량의 성품을 자꾸 잃어버렸다는 거예요. 그거를 이제 회복하는 그런 기도 또 발원 그런 것들이 담겨져 있는 게 자비도량참법이라고 얘기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원래의 자비도량참법이, 다 아시겠지만, 지나온 과거세에 내가 지은 업을 참회하기 위해서 시작된 게 자비도량참법이에요. 혜공이란 스님이. 자비도량참법을 하면서 자비도량이 원래 내가 갖추고 있는 성품이다라는 거죠. 원래 이것은 만들어지는 게 아니고, 우리가 새롭게 뭔가를 신설하는 게 아니라, 원래 내가 갖추고 있던 건데, 그렇게 성에가 끼고 먼지가 껴 있는, 그동안에 말하고 행동하고 마음 먹었던, 마음 먹음으로, 마음 씀씀이로 인해 생겼던 것들을 이 10권의 자비도량참법을 하면서 쭉 씻고 나가는 과정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자비도량참법 하다 보면 어떤 이야기를 하냐면, ‘스님 내 얘기 같아요.’ 이런 얘기를 많이 해요. ‘제 얘기를 여기에 써놓은 것 같아요.’ 그렇게 와닿는 사람은 자비도량참법을 참 잘한 거예요. 자기 이야기처럼 받아들여지는, 자기가 그동안에 잊고 있었던 내지는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들에 대해서 마치 자기 이야기처럼 받아들여서 자비도량참법을 하는 것은 아주 자비도량참법을 제대로 하는 겁니다. 유튜브로 보거나 이 자리에 계신 우리 신도분들은 이번 자비도량참법을 하면서, 이걸 통해서 어떤 기도를, 어떤 것들이 이루어지기를 발원하셨나요. 지금 현상적으로 보면 우리 도량에, 우리 도량이라는 게 우리 생활 터전인데, 우리 터전에서 그래도 제일 먼저 좀 해결해야 될 거는 이 바이러스가 빨리 좀 가라앉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일 겁니다. 오늘 보니까 5만 명이에요. 이게 10만 명까지 가고 최대는 30만 명까지 간다는데요. 그러면서 이제 일상으로의 회복이 빨라질 수도 있겠지만, 세상이라고 하는 게 작용과 반작용에 의해 이루어지는 거거든요. 근데 그렇게 반작용이 많으면 거기에 따른 작용들도 있기 때문에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에요. 다만 이제 그럴수록 이 고비를 우리가 지혜롭게 좀 잘 넘겨야 되겠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개인위생이라든지 그리고 지침을 잘 따라가지고 지혜롭게 건강하게 넘겨야 되겠다.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마는. 참 고비고비마다, 벌써 3년째니까요. ‘다음에 오면은 아마 코로나가 끝날 거다’ 기대를 하고 있으면은 와장창 이렇게 또 숫자가 많아지고. 그래도 이번에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보면, ‘4, 5월 적어도 부처님 오신 날쯤 되면은 좀 괜찮아지지 않을까, 일상화되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해보고, 또 좀 더 욕심을 내보면 ‘이번 부처님 오신 날은 연등 행렬을 하면서 연등을 손에 손에 들고 모든 신도들이 도량을 함께 돌면서 등을 좀 밝혔으면 좋겠다’, 이런 바람도 같이 해 봅니다. 그래서 우리 자비도량참법으로 우리 도량에 우선적으로 이런 바이러스가 좀 빨리 소멸해서 우리가 일상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됐고요. 또 자비도량참법을 하면서 우리 신도분들은 아마도 각자가 다 다른 발원과 원력들을 세우셨겠죠. 그런데 그런 소원과 원력들이 이루어지려면 자비도량을 무너뜨리는 세 가지 요소를 해결을 해야 돼요. 명확하게 파악을 해가지고. 그럼 자비라고 하는 도량이, 자비 도량이 내 마음의 도량일 수도 있고, 또 진관사처럼 이렇게 도량을 꾸미는 것도 도량이라고 하고, 여러분들은, 우리 신도분들은 여러분들의 가정이 도량이에요. 도량이라고 하는 것이 부처님을 모셔서 우리가 예불을 드리고 공양을 올리는 것도 도량이지만, 부처님이 머물러 있는 곳은 다 도량이란 말이죠. 여러분이 이제 집에 있다 하더라도 마음속에는 부처님이 이렇게 계시니까 그곳도 도량이다. 광의적인 개념에서 그렇게 이해해도 되겠습니다. 근데 어떤 도량이 자비라고 하는 거는 뭐냐. 자비는 우리 불자들이 누구나 다 알고 다 이해하고 있는 거지만, 좀 더 쉽게 이해하자면 맑고 밝은 거예요. 이 자비라고 하는 거는 따뜻하고 또 온화한 거라고 표현할 수도 있고, 그게 자비 지혜라고 표현을 하죠. 자비라고 하는 거는 긍정적인 마인드에요. 상대방을 어여삐 봐주고 나 스스로가 긍정적인 생각으로 내 도량을 꽉꽉 채워 나갈 때, 가득가득 채워나가는 거 그게 자비도량이잖아요. 근데 우리는 그렇게 긍정적인 생각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사람을 대하고 일상생활을 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해요. 왜 그렇지 못하냐. 이 세 가지 때문이에요. 첫 번째가 탐욕이에요. 탐욕. 탐욕 때문에 자비도량이 흩트러지는 거죠. 그럼 탐욕이 뭐냐. 그건 좀 있다가 같이 알아보기로 하고요. 두 번째는 번뇌. 탐욕도 번뇌, 큰 개념으로는 탐욕도 번뇌지만, 여기서 말하는 번뇌는 걱정이에요. 걱정. 걱정과 염려. 세 번째는 망상이에요. 망상. 이게 다 같은 개념, 같은데 좀 달라요. 그래서 이거를 잘 우리가 알아야지, 내가 알게 모르게 하고 있는 거란 말이에요. 거기에 지금 오랜 습기로 인해서 나도 모르게 그렇게 하고 있어요. 탐욕은 뭐냐 그러면 탐은 일종의 탐내는 거잖아요. 내 것이 아닌데 탐내는 게 탐이에요. 탐낸다. 욕심내는 거잖아요. 그 욕은 뭐냐. 탐욕할 때 탐은 내 것이 아닌데 내 걸 만들려는 거고, 욕은 노력한 만큼만 얻어야 하는데 노력한 이상으로 뭔가를 바라는 걸 욕이라고 해요. 탐욕은 뭐예요. 내 것이 아닌데 그것을 내가 더 많이 얻으려고 하는 것, 그게 탐욕이라는 거죠. 우리가 이제 일상생활에서 바라는 욕구하고 탐욕하고는 아예 색깔이 다르죠. 이 탐욕 때문에 사람이, 마음이 사나와지기 시작하는 거에요. 따뜻한 우리 마음들이 차가워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 탐욕이 올라오면 마음은 도리어 불이 나는 것 같지만 마음은 더 굳어진다, 차가워져요. 그다음에는 두 번째가 번뇌인데, 걱정하고 염려하고. 우리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가장 큰 질병 중에 하나가, 마음 질병 중에 하나가 걱정과 염려예요. 이게 습관화돼서 많은 사람들과 얘기를 하다 보면 걱정이 너무 많아요. 또 염려가 너무 많아요. 그게 일상화 돼 있고. 그래서 대표적인 게 ‘죽겠네, 죽겠네’ 그러잖아요. 죽겠네. 죽지도 않으면서 ‘죽겠네’ 그래요. 근데 그런 것들이 이제 ‘습관화되기 때문에, 저도 가끔씩 ’힘들어 죽겠네‘ 이 얘기 잘합니다. 힘들어 죽겠네. 근데 그거는 걱정이 그 안에 다 녹아 있어요. 염려, 걱정이. 근데 실제로 그 걱정과 염려가 현실적으로 물론 문제가 돼서 대립이나 갈등이나 여러 가지 부딪침들이 있지만, 대부분이 관념적으로 생각으로 걱정하고 생각으로 염려하는 것들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이거를 내려놔야 되는데 염려와 걱정이 한번 올라오게 되면 그거는 그 흐름으로 계속 끌려가게 돼요. 염려 걱정을 하는 거는 자꾸 알아차려야 되는데 ‘내가 걱정거리다, 걱정이 있다’라고 하면은 걱정하는 나를 자꾸 봐요. 자비도량참법을 기도할 때 제 개인 경험으로는, 자비도량참법을 하면서 첫 번째 얻어지는 힘이 뭐냐 그러면, 시선이, 관점이 밖의 현상에 가 있던 관점이 내 안으로 들어와요. 특히 뒤에 6, 7, 8, 9권 가면, 앞에서는 잘 모르던 게 뒤에 6, 7, 8, 9권쯤 가면, 이 시선을 내 안으로 두게 돼요. 나의 안이비설신의를 살피게 되고, 나의 탐심과 진심과 치심을 살피게 되고, 그런 구조로 돼 있죠. 그 힘을 그대로, 이 걱정과 염려로 내 일상에서 이렇게 꾸며져 있는 그런 마음들을 자꾸 거둬들이는 연습을 해야 돼요. 그래야 자비도량이 회복될 수 있어요. 자비도량참법을 하는 거는 어떠한 기원이나 또 소원을 성취하는 발원도 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자비도량을 회복하는 게 핵심이에요. 그 자비도량참법을 회복하면 그 외에는 자연스럽게 성취가 된다는 거예요. 마치 밖에서 안경에 서리가 껴서 앞이 잘 안 보이는 사람이 따뜻한 방에 들어오면 성에도 안 낄뿐더러 앞이 잘 보이듯이, 내 마음의 그런 자비도량만 회복하면 사물이 여실하게 다 보인다. 또렷하게 보고, 좀 더 쉽게 말하면 끌려 다니지 않는다. 걱정이나 염려로 끌려가지 않는다. 근데 이 걱정이나 염려는 어디서 오는 거냐. 불신에서 와요. 불신, 믿지 않음, 믿지 못함으로. 이거는 거의 100% 비례 돼 있어요. 본인을 믿지 못하면 걱정하게 되고 또 염려하게 되요. 이런 얘기 하면 또 오해받을 것 같아 조심스러운데, 요즘에 무속이 유행이잖아요. 이제 정초가 되니까 점을 보러 한 번씩 가시잖아요. 신수 보러 왜 가냐 이거예요. 궁금하니까 가는 거거든요. 걱정되니까. 올해 혹시나 나쁜 일이 있으면 피하려고. 근데 우리가 가끔 취미로 한 번씩 하는 건 괜찮은데, 너무 거기에 빠져가지고 지침이 되는 사람이 있어요. 생활의 지침. 자비도량참법이 생활의 지침이 돼야 되는데 그런 게 지침이 된 분들도 내가 주위에서 가끔 봅니다, 불자들 중에. 근데 왜 그러느냐. 걱정과 염려 때문에 그래요. 그 걱정 가진 분들 때문에, 그 신점이나 점을 보러 다니는데 왜 그러느냐. 그 마음 바탕을 쭉 따라가 보면 자기를 못 믿어요. 불신할 때, 믿지 못한다고 할 때 그 불신은 부처님을 못 믿는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부처님 가르침을 못 믿는다는 얘기가 아니라, 스님들을 못 믿는다는 얘기가 아니라, 더 큰 문제는 자기를 못 믿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못 믿으니까 걱정이 되고 염려가 돼요. 요즘에 현대인들이 이 걱정과 염려, 그로 인해서 자기 생활에 만족도가 떨어지고, 자기 자신을 못 믿으니 나보다 좀 더 나은 사람들에 대해서 동경하게 되고, 끊임없이 나보다 조금 더, 나보다 좀 더 잘 나고, 나보다 좀 더 잘 살고,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그러면은 굉장히 동경하죠. 동경한 만큼 어떻게 돼요. 마음은 허전해져요. 허전해지니까 걱정과 염려가 되고 생활에 불만이 나게 되고 이게 여러 가지 부수적으로 따라오게 되잖아요. 그래서 <염려와 걱정을 내려놔라>라는 것은 결국은 <나 자신을 믿어라>라는 거에요. 조금 어려운 얘기인데 대승기신론이라고 하는 논서가 있어요. 거기 보면 사신(四信) 오행(五行)이 나오거든요. 네 가지의 믿음과 다섯 가지 행. 네 가지 믿음의 첫 번째가 근본신이라고 그래요. 근본신. 근본신이 뭐냐. 자기 자신을 믿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어떻게 믿냐. 자비도량참법하는 사람은 ‘내가 이미 자비도량을 갖추고 있다’라고 믿고 시작해야 돼요. 이거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자비도량참법을 하는데 내가 원죄가 있어서, 죄가 많아서, 업장이 두터워가지고 그걸 씻어낸다는 게 아니에요. 그럼 원래 판을 바꾼다는 게 아니라, 내가 원래 자비도량을 갖추고 있는데, 내가 말하고 행동하고 마음 씀씀이가 무시겁래로 살았던 그런 찌꺼기 내지는 그런 때를 씻어낸다라는 마음 바탕으로 해야 된다는 거에요.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내가 자비도량이라고 하는 걸 믿어야 되는 거죠. 여러분이 진관사에 아침에 오려고 출발할 때 어떤 마음을 먹고 옵니까. 진관사에 가면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아, 아마 가면은 총무스님이 반갑게 맞이해 주실 거야, 그런 믿음이 있잖아요. 와서 또 총무스님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주지스님 보면 넉넉해지고 그런 게 있잖아요. 부처님 보면 말할 것도 없고. 그런 것처럼 그런 믿음으로 출발해야 된다는 거죠. 믿음으로 출발해야 된다. 두 번째는 염려와 걱정, 번뇌죠. 이거를 좀 내려놔야 된다. 그래야 자비 도랑이 생겨요. 세 번째로는 망상이에요. 망상. 망상은 현실적으로 나를 명확하게, 아주 냉철하게 본인의 생활에 대해서 파악을 하고 그 기반 위에서 생활을 해야 되는데, 붕 떠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예를 들면은 나는 이 정도의 생활의 능력이 있는데 그 능력을 인정하기 싫어가지고 더 하다 보니까 여러 가지 관계라든지 생활들이 얽히기 시작하는 거지요. 그래서 이 망상은 하지 말아야 돼요. 망상은 다른 말로 몽상이라고 그래요. 몽상. 꿈속에서 뭔가를 짓고, 꿈속에서 아무리 로또가 맞아도 꿈 깨고 나면 아무 소용이 없듯이. 그래서 망상을 내려놔요. 망상을 한 마음을 자꾸 내려놔요. 내가 지금 망상을 하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이 세 가지는 점검을 해봐야 됩니다. 내가 탐욕에 지금 물들어 있지 않은가. 내가 걱정과 염려에 찌들어 있지 않은가. 내가 망상 내지는 몽상에 빠져 있지 않은가. 이 세 가지를 점검을 쭉 해서 이 세 가지를 잘 내려놓으면, 정리가 되면 그대로 자비도량이 드러난다는 거예요. 억지로 갖추려는 게 아니라 우리의 자비도량은 그렇게 드러나게 된다. 근데 일상적으로는 우리가 너무 걱정들을 많이 하고 있어요. 2022년 새해가 열렸는데 걱정들을 많이 해요. 물론 이제 코로나라든지 여러 가지 외부적 환경에 의한 염려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내 자신에 대한 염려들이 많죠. 그런 염려들을 좀 내려놓고, 그 내려놓은 마음에 자비도량을 세워나가요. 정월달에 임인년을 맞아가지고 이 자비도량참법기도를 했는데, 제가 보기에는 이것은 1년을 내가 어떻게 설계할지, 어떻게 꾸며갈지를 계획하는 아주 좋은 시간이라고 봅니다. 자비도랑참법 기도를 하면 거기서 적어도 한 구절이라도 내 마음에 와닿는 구절이 있어요. 자비도량참법하다 보면 각자가 자기 근기마다 딱 와 닿는 구절이 있어요. 열 사람이 하면 열 사람이 다 달라요. 그러면 그걸 찾아야 돼요. 어떤 분들은 자비도량참법 하면서 하염없이 우는 분들도 계세요.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내가 정말로 그동안에 말하고 행동하고 마음을 잘 못 썼구나.’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는 분도 있죠. 근데 그중에서도 이제 정말 자기를 울렸던, 마음을 울렸던 그런 구절들을 잘 캡처해가지고, 요즘에는 핸드폰에 기록할 수 있으니까, 사진도 찍을 수 있으니까, 그런 거를 찰칵 찍어가지고, 마음으로도 찍고, 핸드폰으로도 찍어서, 한 달에 한 번이라도 그거를 되뇌면서 자비도량을 회복하려고 하는 노력을 해야 된다. 자비도량을 한 번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꾸준한 되돌림표를 통해서 내가 자비도량기도를 할 때 그 마음들을 잊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저번 주에는 입춘 기도도 하셨을 겁니다. 입춘 기도 때는 입춘방을 붙이잖아요. 입춘대길 건양다경 이런 거 붙이잖아요. 그런데 저는 이제 그런 말 중에 제일 좋아하는 말이 하나 있는데, 소지황금출(掃地黃金出)이라는 말이 있어요. 소지황금출. 소지라는 말은 청소한다는 말인데, 봄이 와서 소지하니 황금출, 황금이 나온다. 여러분 오늘 집에 가셔서 이거를 금방 증명할 수가 있어요. 소파 밑이나 장롱 밑이나 한번 쓸어보세요. 10원짜리 동전이라도 하나 나와요. 잊어버렸던 신용카드가 나올 수도 있어요. 그것보다도 우리 마음을 잘 소지하니까, 청소하니까, 쓸고 닦으니까 거기서 황금이 나오더라. 황금은 뭐예요. 바로 우리가 본연에 가지고 있던, 본래 성품, 본래 부처라는 그리고 그 본래 부처가 다른 말로는 자비도량이잖아요. 본래 부처가 사는 데가 자비도량이란 말이에요. 자비도량에서만 부처님이, 본래 부처님이 나툴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이제 우리가 마음 정비를 잘하면 지금 얘기했던 이 세 가지 탐욕, 걱정과 염려, 망상, 이 세 가지만 잘 정비를 해도 거기서 황금이 나온다는 거예요. 황금이, 부처님 성품이 나온다, 자비도량이 나온다. 여기 황금은 자비도량을 얘기해요. 여러분이 내 안에 자비도량이, 그 자비도량 안에, 내가 그동안에 놓치고 있던 ‘내 아내도 내 남편도 내 부모님도 내 자녀들도 내 자비도량 안에서 내가 돌봐야 되겠구나’라는 마음을 내면 보는 시야가 달라지잖아요. 내 자비도량을 가꾸면 말 그대로 진정한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있는데, 자비도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비도량으로 초대하지 않고, 번뇌가, 욕심이, 걱정과 염려가 또 망상이 지글지글하는 거기에, 그 마음으로 남편을 초대하고 아내를 초대하고 자녀를 초대하고 또 이웃의 인연들을 초대하니까 힘든 거에요. 힘이 안 든다는 게 이상한 거에요. 힘들게 그렇게 하지 말고, 자비도량을 열어라. 자비도량을 열면 거기에는 정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그런 스스로의 믿음과 따뜻함을 느낄 수가 있다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가 법당에 가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시고, 가장 일반적으로 요즘에는 지장보살님하고 관세음보살님이 있는데요. 마지막으로 저는 이 두 분 보살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분을 비증보살(悲增菩薩)이라고, 비증, <자비로서 중생을 인도한다.> 그래서 그분을 자비할 때 비자, 증명할 때 증자 써가지고 비증보살이라고 해요. 문수, 보현은 지증보살(智增菩薩)이라고 해요. 지혜를 우리에게 증명하는 분이다. 근데 비증보살이, 이 두 분 관세음보살님과 지장보살님 두 분이 특징이 있는데, 지장보살님부터 말씀을 드리면, 파란 머리에 지팡이를 가지고 계세요. 그 지팡이를 가만히 보면 큰 고리가 이렇게 세 개가 있고, 그 고리 두 개 양쪽에 3개씩 동전만한 고리가 달려있어요. 근데 그 지팡이가 뭘 의미하냐. 육바라밀이에요. 지옥문 앞에서 지옥에 오는 모든 중생들을 육바라밀로, 바라밀을 연설하면서, 마음을 전환시켜준, 그런 마음을 바꾸게 하는 그런 역할을 하신다고요. 여러분도 자비도량을 꾸려가면서 뭔가 의지하는 게 필요하다면 저는 여러분에게 지장보살의 이 육환장, 여섯 고리가 있는 이 지팡이를 마음에 다 드리고 싶어요. 여러분 힘들 때마다 이 지장보살의 지팡이가 여러분을 지탱해 줘요. 또 하나는, 그 지팡이를 딱 이제 마음에 지니고, 그다음에 관세음보살님은 가만히 보면 관세음보살님은 아주 화려한 화관을 쓰고, 그 화관 중앙에 부처님이 한 분 계세요. 근데 그 부처님이 어느 부처님이냐 그러면은, 아미타 부처님이에요. 관세음보살님의 덕성 중에, 이근원통 또 대자대비니 여러 가지 덕성이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내가 보기에는 으뜸인 것은 어딜 가든 어느 때든 항상 아미타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내가 어떤 생활을 하든 간에 항상 이마에는 아미타부처님을 딱 이렇게 모시고, 아미타 부처님이 여는 복락 세계의 보살로서 계시는 거란 말이죠. 여러분도 지금 이 순간부터 이 미관 위에 쏙 들어가는 부분이 있는데 여기다가 자비도량을 탁 새기세요. 타투라고 하나, 문신을 새기는 거 있잖아요. 이걸 하나씩 새겨줄까요. 자비도량이라고. 근데 지금은 안 보이는데 다 새겨져 있어서, 여기에 제3의 눈이 생긴 거예요. 제3의 눈이. 여기 자비도량이 다 써 있어요. 마음에는 지장보살님의 그 든든한, 내가 힘들고 어려운 갈래로 빠지지 않도록 나를 지탱하는 지장보살님의 지팡이가 있는 거고, 내 이마에는 항상 나의 앞길을 밝혀줄 수 있는, 자비도량을 열 수 있는 자비도량의 제3의 눈이 이 순간에 딱 생긴 거라 말이죠. 그러니까 여러분이 올해는 아무 걱정 안 해도 돼요. 혹시 살다가 아무 일이 없겠지만, 일이 생기면 진관사 와서 우리 총무스님한테 얘기하면 다 해결돼요.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는 걱정이 너무 많아요, 걱정이. 걱정하지 말고 자비도량을 잘 마음으로 열어서 모든 일을 성취하는 그런 불자가 되시기를 발원하면서 오늘 이야기 접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신년하례법회] 2월6일 신년하례법회 주지스님 법문
주지 계호스님 2022-02-06
안녕하세요. 저희들은 네 번의 설날을 맞이했습니다. 음양의 설날과 절기의 설날. 양력의 설날은 양력 1월 1일이고, 음력의 설날은 음력 정월 초하루입니다. 그리고 절기로는 동지의 작은 설이라고 한 번 쉬었고, 입춘날 새해를 맞이해서 <이제 큰 복이 돌아오십니다>라는 의미의 새해를 지났어요. 그래서 네 번의 새해를 지내면서 처음에 하는 인사가 뭐죠?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입니다. 그런데요, 광덕스님하고 일타스님께서 하신 세배는 <아송구 군영신(我送舊君迎新)>이에요. <나는 묵은 것을 보내니 그대는 새것을 맞이하소서>. 송구 신축 영신 임인년이에요. 올해가 임인년이죠. 흑범이라고 그러죠. 그러니까 그냥 백범이 아니에요, 흑범이에요. 용은 오복을 불러들이고, 호랑이는 삼재팔난 재액을 면한다고 해요. 그래서 보통 민속화 같은 데서 호랑이 그림을 <재액난을 다 없애주십시오>하는 의미로 딱 정면에 붙인다든지 합니다. 그래서 좌청룡 우백호라고 그러죠. 왼쪽에는 청룡이 지켜주고 오른쪽에는 백호가 지켜주는데, 올해는 임인, 흑범이에요. 그래서 코로나19도 잘 견뎌내고, 모든 것을 다 견뎌내 가지고 아주 용감무쌍하게 헤치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진관사에서는 기도로 평생을 일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기도라는 것은 금방 생겨나는 게 아니고, 안개 속에 옷이 젖듯이 서서히 내 몸에 가피가 됩니다. 그래서 삶이 그대로 수행이고, 수행이 그대로 삶이에요. 특별히 기도도 하고, 특별히 기도하는 거는 예외로 더 열심히 하자는 의미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생각이 단조로워야지 모든 게 단조롭습니다. 내 생각이 행동으로 옮겨지고, 행동으로 옮겨지면 그게 습관화되는 거거든요. 습관화되는 내 몸이 그대로 인생이에요. 그럼 우리는 좋은 습관을 쌓아야 되겠죠. 항상 기도하는 자세, 항상 남을 배려하는 자세. 그래서 종교의 최고의 정의는, 호법부장도 하셨던 세영스님께서 최고의 종교는 친절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자비도 있어야 되지만, 친절 지혜도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자비는 미소로 전개되고, 친절은 지혜로서 표현돼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남을 위해서 배려하고 남을 위해서 좋은 말 하고. 그래서 우리가 정구업진언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정삼업진언 하죠. 제일 많이 일으키는 업이 구업이에요. 부처님은 금구성언이라 해가지고 하시는 말씀 말씀보다 아주 금구의 성언인데, 중생은 하다 보면 그게 구업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수피 격언에 보면, 말이 입 밖으로 나오면 세 가지를 생각해 봐야 된다고 그랬어요. 첫 번째 물음은 자기 스스로에게 묻는 거예요. 진실한가. 두 번째 물음은 필요한가. 세 번째 물음은 친절한가. 이 세 가지, 진실의 문, 필요의 문, 그다음에 친절의 문인데, 이 세 가지를 감당할 수 없으면 침묵의 방으로 보내는 거예요. 그러면 결론이 뭐예요. 말하지 말라는 거죠. 우리 그 묵언표찰 달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말을 많이 하면 남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많아요. 침묵은 금이고 웅변은 은이라고 하듯이, 말로써 우리는 남에게 상처 주지 말고, 말로써 이웃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런 수행자가 되면서, 서서히 기도하면서, 1년 내내, 올해는 내가 무엇으로 화두를 삼을까, 명상을 할까 생각해보세요. 사람이 살아가면서 눈에는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귀에는 익힌 걸 좋아하거든요. 노래를 많이 하는 사람은 노래 가사 들으면 하루 만에 외워요. 그렇지만 익히지 않은 거는 안 익혀져요. 불경을 독송하려면요 안 익혀져요, 안 익혔기 때문에. 제가 요새 경전을 좀 독송하다 보니까 그 경전의 공덕이 내가 함으로써 모든 사람 주위가 밝아진다는 것을 느꼈어요. 여러분들이 천수경을 한다든지 관음경을 한다든지 법화경을 한다든지 금강경을 한다든지 그 경의 공덕이 모든 사람에게 다 누려졌으면 하는 그런 마음입니다. 그래야 되겠죠. 그렇게 꼭 하시는 걸로 합시다. 그래서 책은 소년의 음식이 되고 그다음에 노인의 즐거움이 되고 위급하고 어려운 때에 양식이 된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어떤 책이든지, 경전을 독송한다든지, 책을 본다든지, 여러 가지 내가 나한테 도움이 되는 거를 보면은 다 이익이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노는 입에 뭐 한다고요? 염불하듯이 좋은 말하고 좋은 생각 내시고요. 왜냐하면 생각이 행동이고 행동이 습관이기 때문에, 그 습관이 우리 몸이에요. 그러니까 좋은 습관 지어가지고 1년 내내 무탈하시고요. 자비도량참법기도도 사실은 십악업을 녹이는 기도예요. 그러니까 과거무시겁래에, 제가 그랬잖아요, 내 안의 업장을 소멸해가지고 드러내는 기도가 바로 백신이라고. 그러니까 우리 열심히 하고 열심히 정진 합시다. 이 금강저를 오늘 선물한다는데, 금강진언 <옴 오륜니 사바하>아시죠. 제가 법인할 때 항상 금강저를 가지고 있죠, 그게 뭐냐 하면 <모든 악이 나한테 침범하지 말아라> 이런 의미예요. 그러니까 이걸 가지고 있으면서 내 마음에 나쁜 생각, 남을 미워하는 생각, 탐진치 삼독까지 다 없애면 너무 좋아요. 그러니까 이걸 가지고 있으면서 열심히 합시다. 부처님 되십시다.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
[신중기도] 2월3일 음력 1월 정초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2-02-03
임자년 임인년, 임자년 지나갔네요. 임인년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오늘 법문은 새해맞이 삶의 이야기, 새해맞이 삶의 이야기, 이런 내용입니다. 한자로는 연초생활담론, 연초생활담론 그렇습니다. 불교의 목표 목적은 현증수복(現增壽福), 현세에는 수명과 복덕을 증장시켜서 기르고, 당생정찰(當生淨刹), 당내의 내생에는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왕생하고, 구경성불(究竟成佛), 마침내는 성불해서, 전법도생(傳法度生), 법을 전해서 중생을 제도한다. 이것이 불교의 목표이고 목적이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항상 그 복을 닦기를 기원하는 축원을 계속합니다. 그래 가지고 축원문에 보면 무병장수 축복을 해요. 무병장수 복을 빌어요. 병 없이 오래오래 살기를 원하는 그런 축원. 그다음에 부귀공명 축원. 무병장수 부귀공명. 부자로 살고 귀하게 살고 좋은 이름 남기고. 그다음에 자손 창성, 창은 빛날 창자인데, 자손이 빛나고 왕성하고, 복덕구족, 지금 부모나 자손이나 다 복덕이 구족하고, 천재는 설소(千災雪消)하고, 천 가지 재앙은 눈처럼 녹고, 만복은 운흥이라(萬福雲興), 만가지 복덕은 구름처럼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이런 축원을 계속하거든요. 이것이 복덕축원이에요. 열심히 살다. 성공하다.쪽팔리다. 부끄럽다.창피猖披하다(猖 : 옷 입고 띠 매지 않은 모양 창. 披는 被義) (猖披 衣不帶之貌 狂妄偏邪 漢韓大辭典9. 233) (창피 의부대지모 광망편사 한한대사전9.233) 그러기 위해서 우리 삶을 가만히 되돌아보면 잘 사는 삶이 어떤 삶인가. 열심히 살다, 열심히 성공하다, 열심히 살아서 성공하는 삶, 잘 사는 삶이라고 하거든요. 열심히 살아서 성공하다. 성공에는 여러 가지 좋은 거 다 성공이에요. 학업 성공도 성공이고, 사업 성공도 성공이고, 건강을 잘 유지하는 것도 성공이고, 온갖 것이 다 성공이거든요. 근데 요즘에는 열심히 살고 성공하고 이것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문제는 행복이다. 성공해도 행복하지 않더라. 열심히 살아도 내가 어디로 가는지 살다 보면 뭐 남는 게 없더라. 이런 생각이 있기 때문에 그저 행복하고 싶다. 성공하고 싶지도 않고 열심히 살고 싶지도 않고 행복하고 싶은 것이 나의 바람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도 많거든요. 그러니까 열심히 살고 성공하고 행복하고 그게 좋은 거예요, 하여튼. 열심히 살고 성공하고 행복하고. 근데 사람은 참 오묘한 것이 돼서 부끄러움도 알고요, 성공 속에는 부끄러움이 있어요. 그래서 이 부끄러움이 또 굉장히 나를 괴롭혀요. 우리나라 근래에 보면 대한민국 고위공직자 인사청문회라는 게 있는데, 고위공직자들의 인사청문회. 그 사람을 등용할 때 청문회를 해보면, 거기에 지명돼서 나오는 사람들이 다 성공한 사람들이에요. 학벌 좋고 지금까지 경력 좋고, 업적 좋고 다 성공한 사람들이 고위공직자 후보자로 나와서 청문을 받는데, 전부가 다 ‘부끄럽습니다.’라는 말을 해요. 부끄럽습니다. 그거 안 하는 사람 없어요. 또 한마디 더 해요. ‘그때는 그것이 관행이었습니다.’ 이 부끄럽다, 관행이다, 이 말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그래서 이 부끄러움이라는 게 사람에게 있다. 성공 그 속에는 부끄러움이 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성공도 하고 부끄럽지도 않고 행복하기도 하고, 이게 가장 잘 사는 건데 그렇게 쉽게 될 수는 없는 일이거든요. 이 부끄러움이 ‘쪽 팔린다’는 말이 있어요 또. 쪽 팔린다. 그래서 그 쪽이라는 거는 얼굴을 좀 세속적으로 표현하는 말이에요, 그때는 쪽이. 저쪽 저쪽 그게 아니라 얼굴, 사람의 얼굴을 속되게 표현할 때 쪽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누구를 만나서 얼굴을 못 들 그런 처지가 되면 쪽을 못 쓴다. 그러니까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이 말이거든요. 쪽을 못 썼다, 이 말이에요. 그 쪽 팔린다라는 건 팔려 버리면 없어져요. 그래서 그 말은 체면이 깎인다. 그걸 쪽 팔린다고 그래요. 체면이 깎인다. 얼굴이 내 얼굴이 아니고 없어져 버렸다. 그래서 이게 얼굴이라는 게 뭔가 자기 자신을 얼굴로 표현하는데 그 얼굴 안 서는 일이 종종 있다. 체면 안 선다, 쪽 팔린다, 이런 거고요. 또 창피스럽다(猖披)는 말이 있어요. 창피스럽다. 창피라는 거는 한자인데 그게 개 견변에 빛날 창자한 건데, 개처럼 움직이는 걸 창자라고 그러고, 피는 그게 이불 피자와 같은 건데. 그게 뭔 말이냐면 개가 옷 입듯이, 허리띠 매지 않고 옷 입는 걸 창피라고 그래요. 옷은 입었는데 허리띠를 안 맸어. 그럼 그 모습이 아주 이상하거든요. 그걸 창피라고 그래요. 그래서 창피라는 걸 한한대사전에 찾아보면 창피는 의부대지모(衣不帶之貌)라, 옷은 입었는데 허리띠를 매지 않은 모습이다. 한번 상상을 해봐요. 옷 입고 허리띠를 안 맸다. 그 아주 이상할 거 아니에요. 그런 모습을 느낄 때 창피스럽다. 이렇게 얘기를 하거든요. 그래서 창피라는 게 이게 뭐냐. 근데 인터넷에서 이상한 사연을 하나 봤는데, 어떤 예비 시어머니 될 사람이 예비 며느리한테 며느리 자격 시험을 보겠다고 A4 용지로 한 세 장을 글을 만들어서 문항을 쭉 썼어요. 그런데 첫째 문항이 시어머니한테 전화하기 이건데 첫 번째 3일에 한 번, 두 번째 일주일에 한 번, 세 번째 한 달에 한 번,네 번째 두 달에 한 번 이런 문항이 있어요. 그래서 그걸 보고, 그다음에 아들한테 밥 차려주기. 매일같이 뭘 차려주고 뭘 차려주고. 그래서 그걸 보고 예비 며느리 될 사람이 말을 했대요. 여기 보기에 하나가 없다. 뭐냐. 한 번도 안 차려주기. 한 번도 전화 안 하기. 이게 있어야 되는데 이게 없어서 난 볼 수가 없다고. 그러고 하는 말이 전화 한 번도 안 하고 밥 한 번도 안 차려주고 이거 있으면 내가 볼지도 모르는데 이게 없어서 난 안 본다고. 그러니까 그 예비 시어머니 될 사람한테 예비 며느리 될 사람이 ‘이거 사진 찍어서 인터넷에 올려도 돼요?’ 물었대요. 그러니까 딱 하는 말이 ‘창피스럽게 그걸 왜 올려요.’ 그러더래요. 여기에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어요. 며느리 자격시험 보는 건 욕심인데, 자기 욕심이 외부에 알려지는 건 싫어하는 거예요. 욕심이 알려지는 걸 창피스럽다고 그래요. 이게 인간이에요. 자기가 시험 본 답안지인데 그거 뭐 정당하고 떳떳하면 인터넷에 아무리 알려져도 상관없어야 될 거 아니에요. 근데 알려지는 건 창피스럽다고 그러고, 며느리 자격 시험은 보고 싶어 하고. 그래서 그 말 듣고 내가 생각한 게 있어요. 나 같으면 이거 자격시험 보기 전에 예비 시어머니 면접부터 보겠다고. 면접부터 보겠다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 쫙 해서 뭐라고 대답하는지 보자고, 그래 나와야지, 그거를 그냥 안 본다고 그러는 건 너무 얌전하다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성공에는 욕망인데, 자기 욕망 속에는 창피스러워하고 쪽 팔려 하고, 부끄러워 하는 것이 들어있어요. 그래서 이런 것을 최대한 줄이면서, 성공도 하고 행복도 하고 또 복도 받고. 이것이 잘 사는 길이고 이것이 아주 복되게 사는 길이거든요. 세상살이 : 인생 없이 세상 살기 인생살이 : 인생으로 세상 살기 멋지게 살기! 근데 어떤 큰 스님은 ‘지금 행복하십시오’ 이런 가르침을 주신 분이 계세요. 지금 행복하십시오. 행복은 오늘은 안 하고 내일은 하고 그게 아니라, 지금 행복한 것이 그게 기도고 그게 정진이거든요. 그리고 그 전에 경봉 큰스님, 통도사 경봉 큰스님은 늘 무슨 말씀을 했느냐면, ‘멋지게 살아라, 멋지게 살아라’ 이런 말을 계속 하셨어요. 사바세계를 무대로 삼고 연극 한바탕 멋지게 하고 가거라. 지금 행복하다는 말도 참 중요한 말씀인데, 누구나 다 이루기 어렵고, 멋지게 살라는 말도 우리 이 느낌의 멋이라는 걸 느끼고 있거든요. ‘야 멋있다. 멋지다’ 이런 말을 써요. 그런데 또 겉멋 들면 안 된다 이래요, 겉멋. 그래서 멋도 참 멋이 있고 겉멋이 있는데, 이게 분수에 맞고 능력에 맞고 자기 내면과 외면이 같이 맞을 때 그게 멋지고 멋있는 거거든요. 멋이 아주 매우 높을 때 그걸 멋지다라고 표현을 해요. 멋있다보다 더 강력한 말을 멋지다, 멋 중에 최상의 멋을 멋지다 이러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되는가. 멋지게 살려면 구하는 것이 없이 살아야 돼요. 구하다 보면, 행복을 구해도 행복의 노예가 돼요. 재물을 구하다 보면 재물의 노예가 되고, 사람을 구하다 보면 사람의 노예가 되고, 구하는 건 전부 얽매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멋지게 살려면 아무 데도 구하는 거 없고 얽매임 없이 살 때 그게 멋진 거거든요. 釋尊掩關 達磨面壁세존엄관 달마면벽 그래서 누가 멋지게 살았나 석가세존이 마갈 엄관하시고, 부처님께서 마갈타국에서 엄관했다. 이 관이라는 거는 자기 안이비설신의, 보고 듣는 감각기관인데, 구하려면 감각기관을 항상 열어야 돼요. 뭐가 있나 눈으로 살피고, 뭐가 들리나 귀로 살펴야 돼요. 근데 딱 눈과 귀를 막아버리고 그리고 본래 자기를 관찰해요. 그러면 본래 자기와 세상의 자기가 딱 조화가 될 때 그게 멋진 거예요. 본래의 나와 세상의 나, 그리고 달마 대사가 소림 면벽이라, 달마 대사가 소림에서 벽을 바라봤다. 벽을 바라봤다는 건 구하는 마음을 막았다는 소리에요, 그게. 눈으로 구하는 거 막고 귀로 구하는 거 막고 그게 벽이에요. 구하는 마음이 전혀 없이 세상의 나는 앉아 있는 나고, 본래의 나는 그대로 항상 하는 나, 본아와 세아가 딱 조화를 이루어서 아무 데도 매임이 없으니 그걸 일러서 멋지게 사는 거라고 한다. 心如境亦如 無實亦無虛 심여경역여 무실역무허有亦不管 無亦不拘 유역불관 무역불구不是賢聖 了事凡夫불시현성 요사범부(龐居士語錄卷上) (방거사어록권상) 법문할 때 많이 하는 말씀인데, 중국에 방거사라는 분이 있었는데요. 방거사, 당나라 때인데, 그분의 무슨 법문이 있느냐. 유역불관 무역불구(有亦不管 無亦不拘), 유는 사는 건데 사는 것에도 전혀 집착하지 않고. 관계한다는 말은 집착하지 않는다, 사는 것에도 전혀 집착이 없어요. 왜냐하면 본래의 나로 살기 때문에 그래요. 무역불구라 죽는 것에도 전혀 구애받지 않아요. 이게 멋지게 사는 거예요. 사는 데도 집착하지 않고 죽는데도 구애받지 않고, 유역불관 무역불구 그런데 그게 불시현성(不是賢聖)이라, 현인도 성인도 아니다. 현성이 아니다. 그럼 뭐냐 요사범부(了事凡夫)라. 세상 일에 아무 구하는 일이 없는 평범한 범부다, 이런 얘기예요. 요사범부, 마칠 요, 일 사. 모든 일을 다 마치고 난 평범한 사람이다. 이런 말을 했는데 이게 참 멋진 거예요. 사는데도 집착하지 않고 죽는데도 구애받지 않고 또 어느 격이 없어. 현인도 아니고 성인도 아니고 요사범부라. 구하는 일이 없는 평범한 범부다. 그런 법문이 있고요. 浮雲富貴非留意 蝸角功名豈染情 부운부귀비유의 와각공명기염정春日快晴春睡足 臥聽山鳥百般聲춘일쾌청춘수족 와청산조백반성(清虚堂集卷1)(청허당집권) 評曰 鳥聲什麼 法界藏身 無生歌曲 평왈 조성십마 법계장신 무생가곡 聽而復聽 長聲空谷 청이부청 장성공곡 조선시대 서산 스님은 부귀를 뭐라고 봤냐 그러면 뜬구름이라고 봤어요.부귀, 부하고 귀한 것이, 재산과 권력이 뜬구름이다. 왜냐하면 이슬같이 날라가는 게 재산이고 권력이거든요. 그래서 부운부귀에 비유의(浮雲富貴非留意)하니, 뜬구름과 같은 부귀에 생각을 두지 아니하니, 이게 서산스님 자기 인생관이죠. 부귀를 위해서 사는 게 아니다. 와각공명에 기염정(蝸角功名豈染情)가, 공명을 달팽이 뿔로 본 거예요. 달팽이를 보면 이렇게 뿔이 보이거든요. 그래서 좋은 이름 얻는 거는 달팽이 뿔과 같다. 달팽이 뿔과 같은 그런 공명에 기염정, 어찌 감정을 물들이겠는가. 거기에 감정을 두겠는가. 춘일이 쾌청춘수족하니(春日快晴春睡足), 봄날이 아주 쾌청해서 봄 잠이 만족하니, 와청산조 백반성이라(臥聽山鳥百般聲), 산새의 여러 가지 소리를 누워서 듣는다. 이게 서산스님 시인데요. 이게 멋지게 사는 거예요. 부귀도 공명도 아무 상관이 없고 따뜻한 봄날 봄 잠이 만족해. 이게 잠이라는 게 잠자리만 좋다고 잠이 오는 게 아니에요. 꿈자리가 편안해야 이게 잠이 만족해요. 그러니까 꿈자리도 좋고 잠자리도 좋아야 되지, 잠자리는 좋은데 꿈자리가 사나우면 좋은 그 침구를 만드나 마나예요. 근데 봄의 날씨도 좋고 봄 잠도 좋아서 경치도 그보다 더 좋을 수가 없고 잠도 그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뭐 하느냐. 여러 가지로 지저귀는 산새 소리를 편안히 듣는다. 이런 게 이제 멋지게 사는 겁니다. 이런 게 구함이 없이 즐거운 거. 구함 없이 즐거운 거, 지금 행복한 거 참 멋진 거거든요. 그래서 종범이 거기다가 평을 하기를, 평왈 조성은 십마호(鳥聲什麼), 도대체 이 새 소리는 뭐냐. 법계장신에 무생가곡이라(法界藏身 無生歌曲), 이 법계의 온갖 몸에서 나오는, 장자는 감출 장자, 여러 가지라는 말인데요. 법계의 여러 몸에서 나오는 생멸 없는 가곡이다. 노래다. 불생불멸의 노래다. 청이 부청하면(聽而復聽), 듣고 또 들으면 장성공곡이라(長聲空谷), 빈 골짜기에 소리가 길게 들린다. 이 빈 골짜기에 소리가 길게 들린다는 말은 뭐냐, 이 빈 골짜기라는 공곡은 적멸보궁이라는 뜻이에요. 적멸보궁. 적멸보궁에 이게 뭐냐 적멸보궁에 원광원음이라. 장성이라는 건 둥근 광명 둥근 음성이다. 적멸보궁 원광, 둥글 원자 빛광자, 둥글 원자 소리 음자, 새 소리 하나 들으면 생사 없는 적멸보궁에서 들려오는 우주의 꽉 찬 광명이고 우주에 꽉 찬 소리다. 그렇게 종범이 평을 달아봤어요. 過去中未來 未來中現在 과거중미래 미래중현재三世互相見 一一皆明了삼세호상견 일일계명료 (華嚴經 普賢行品)(화엄경 보현행원)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과거 현재 미래에 궁금한 게 전혀 없어요. 의심나는 거 전혀 없고 궁금한 거 없고 불안한 거 없고요. 이게 뭐 괴로운 거 없고. 화엄경 보현행원품에서 삼세호견(三世互相見)을 얘기를 했는데요. 삼세호상견, 삼세는 과거 현재 미래 아니에요. 상견이라는 거는 호상이라는 건 서로 호, 서로 상 서로서로 본다. 이게 호상견인데, 이게 뭔 소리냐. 이런 지혜가 있는 사람은 미래가 있는데 그 미래가 과거의 미래라는 거예요. 과거의 미래, 과거 중의 미래, 미래는 과거다, 그래서 과거 속의 미래다. 또 현재는 미래 중의 현재라는 거예요. 미래 가운데 현재라는 거예요. 그러면 경문은 과거 중의 미래요, 미래 중의 현재라 이렇게 돼 있는데, 과거 가운데 미래고 미래 가운데 현재다, 이거를 말로 이어서 생각해 보면, 현재의 미래, 현재는 바로 미래다. 그러니까 현재만 떡 보면 미래는 저절로 보이는 거예요. 이게 지혜로 세상을 보는 거예요. 또 미래는 과거예요. 과거 중의 미래니까 그 미래를 알려고 애쓸 필요가 없어요. 과거를 가만히 돌아보면 그게 미래예요. 또 현재를 가만히 돌아보면 그게 미래예요. 현재의 미래고 미래의 과거다. 미래는 과거고 또 현재는 미래다. 그러니까 뭐 궁금할 게 하나 없어요. 무슨 이상할 거 하나 없고 어디 가서 물어볼 거 하나 없어요. 과거를 가만히 돌아보면 그게 미래요, 또 현재를 가만히 돌아보면 그게 미래에요. 이렇게 삼세가 서로서로, 삼세를 서로서로 보니 일일이 개명요라(一一皆明了), 하나하나가 다 분명하다, 또 분명히 알 수 있다. 하나하나를 다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궁금한 거 하나 없죠. 미래는 바로 현재고 현재는 바로 미래인데, 미래는 바로 과거다. 과거 봐요 그러면 그게 현재예요. 현재 봐요 그러면 그게 미래에요. 그러니까 지나간 한 100년만을 가만히 연구를 해봐도 앞으로 무슨 일이 돌아올지 훤히 다 알거든요. 멋지게 사는 거예요. 그래서 금년에 기도 잘해서, 처음이 1년이니까 시작이 한 해거든요. 시작을 아주 복되게 하면 1년 내내 복되거든요. 오늘 법문 마치겠습니다.
-
[49재] 1월 27일 49재 법문
종범스님 2022-01-27
금일 영가 지심제청 지심제수 緣生緣滅 五蘊緣身연생연멸은 오온연신이요 無生無滅 眞如法身무생무멸은 진여법신이로다나무아미타불 극락세계 청정묘국, 극락세계는 청정한 묘한 국토이다. 극락세계 청정묘토를 가는데 어떻게 가느냐. 우리 몸에 생로병사신이 있고 불생불멸신이 있는데, 그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그 몸으로 극락세계에 간다. 그 법문이거든요. 연생연멸(緣生緣滅)은, 인연으로 나서 인연으로 사라지는 것은, 오온연신(五蘊緣身)이요, 다섯 가지가 뭉쳐서 이루어진 인연의 몸이요. 무생무멸(無生無滅)은, 낳음도 없고 사라짐도 없는 진여, 무생무멸은 진여법의 몸(眞如法身)이다. 진여법, 하늘과 땅이 생기기 전에도 여여상여(如如常如)하고, 그러하고 그러해서 항상 그러하고, 하늘과 땅이 사라진 뒤에도 여여상여라, 그러하고 그러해서 항상 그러하다. 그 몸을 진여법신이라, 진여법의 몸이다. 이 진여법은 일체 범부는 모르고, 일체제불, 깨달은 사람이 뭘 깨달았냐. 이 진여법을 깨달은 거예요. 진여법을 깨달으면 그 순간에 일체의 세계가 극락세계가 돼요. 진여법신은 극락 세계다. 진여법신으로 돌아가면 극락세계를 마주하는 거죠. 勿形一念 靈明性覺 물형일념이 영명성각이니先天後地 圓明常照 선천후지하야 원명상조로다不可思議 解脫境界 불가사의 해탈경계가無相無礙 寂滅寶宮무상무애하여 적멸보궁이로다나무아미타불 그러면 불생불멸하고 극락세계인 것을 도대체 누가 아느냐. 불생불멸은 누가 알고 극락세계는 누가 아는가. 이게 참 중요한 문제인데요. 중생이 미혹하는 게 대상만 알고 마음을 모른다. 집경미심(執境迷心)을 한다. 집경, 경계에만 집착하고 마음을 미혹한다. 그걸 미혹범부라고 그래요. 경계, 경계가 뭐냐. 감각 대상인데, 눈의 대상, 귀의 대상, 생각의 대상, 감촉의 대상인데요. 그 경계에만 집착하고 그 경계를 아는 마음은 모른다. 그걸 미혹이라고 하죠. 그 마음은 경계를 떠나서 찾아보니 없더라. 마음은 몸에 찾아봐도 없더라. 그래서 마음은 분명히 대상을 느끼는데, 찾아보면 몸에도 없고, 허공에도 없고, 어떠한 장소에도 없더라 이거에요. 그래서 마음을 알아야 되는데, 어떻게 하면 이 찾아봐도 없는 마음을 알 수가 있는가. 멱심불가득(覓心不可得), 찾을 멱자가 있는데요. 마음 심자, 멱심. 불가득, 얻을 수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되냐. 정심활연명(靜心豁然明), 고요할 정자, 마음을 고요히 한 활연이라, 활연이라는 건 걸리는 게 하나도 없다, 이 말인데요. 걸리는 게 하나도 없이 밝다. 그래서 마음은 대상에서 찾으면 안 되고, 마음은 고요히 하면 나타난다 이거예요. 이게 아주 불가사의 비법이에요. 마음은 찾지 마라. 마음을 고요히 하라. 정심이면 활연명인데, 멱심이면 불가득이라. 삼초입정이, 마음을 삼초만 딱 그치면, 정이라는 건 그칠 정자인데요. 그친다는 말이에요. 정에, 그치는 데 든다, 입정. 3초만 딱 이렇게 멈추면 보이는 걸 알아요. 그냥 보면 모르는데, 보는지 안 보는지도 모르는데, 딱 그치고 보면 ‘내가 보고 있구나’ 이걸 알게 돼요. 딱 그쳐서 들으면 ‘내가 듣고 있구나’ 이걸 알게 되거든요. 그래서 지금 현재 눈으로 보는 그게 마음이고, 귀로 듣는 그게 마음인데, 만날 마음으로 보고 마음으로 들으면서 그 마음이 뭔지 전혀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평소에는 보는 줄도 모르고 보고, 듣는 줄도 모르고 듣는단 말이지요. 딱 그쳐보면 내가 보는 걸 알아요. 보는 것까지는 알아요. 딱 그치고 들으면 듣는 것까지는 알아요. 근데 삼초입정으로 보고 들으면, 노래를 들을 때도, 그냥 들으면 노래 듣는 줄도 모르고 들어요. 딱 그쳤을 때 ‘내가 노래 듣고 있구나’ 또 ‘뭘 보고 있구나’ 그런데 이 마음이 이게 너무 불가사의해서, 노래 들을 때는 노래 들어도 하나도 이게 뭐 순서도 없고 무슨 조작도 없고, 바람 소리 들을 때는 바람 소리 들어도 아무런 뭐 하는 일 없이 그냥 들어요. 이걸 부동성용(不動性用)이라고 해요. 이걸 부동, 움직임이 없이 본성이 작용을 한다. 마음이라는 게. 뭐를 시작하고 계획해서 하는 게 아니라, 부동성용으로 본성 작용이요, 그냥. 부동이라는 건 조작 없이, 동의 없이. 그냥 하늘 볼 때는 부동성용으로 그냥 하늘을 봐요. 땅 볼 때는 움직임이 없는 본성 작용으로 그냥 땅을 보고. 화날 때는 그냥 화내고. 좋아할 때는 그냥 좋아해서. 이게 하늘로 고정되어 있으면 땅을 못 볼 텐데 하늘도 보고 땅도 보고 사람도 보고 못 보는 게 없어요. 이걸 불가사의 본성, 본심이라고 하거든요. 생각할 수 없는 본성심, 본래심이다. 뜨거울 때는 뜨거운 거 알고, 차가울 때는 차가운 거 알아서, 이게 마음이 뜨거운 걸로 고정돼 있다면 차가운 걸 못 느낄 텐데, 자꾸 또 느끼고. 못 느끼는 게 없는데 무슨 조작해서 느끼는 게 아니라 아무런 순서도 없이 조작도 없이. 평생을 보고 들었어도 그 본성, 본심은 털끝만큼도 동요가 안 됐어요. 이걸 부동현용이라고, 동의 없이 작용을 나타냈다. 그게 마치 해인삼매라고 그러는데, 바다에 여러 가지 모양이 비춰졌지만 바다는 그냥 가만히 있는 거예요. 바다가 움직여서 바다의 그림자가 비춰진 게 전혀 아니다. 이 말이요. 부동현용 해인 삼매. 이 마음을 고요히 하고 고요히 하고 있다. 어떤 것도 아니지만, 어떤 것도 다 해당되는 그 본성심이 다 나타나더라. 마음은 모든 것이 아닌데 모든 것을 다 해요. 그럼 거기가 극락세계에요. 마음은 모든 것이 아닌데 모든 것을 다 한다. 그럼 마음은 생로병사가 아닌데 생로병사를 다 하고, 마음은 불생불멸이 아닌데 불생불멸을 다 하고, 마음은 천지 만물이 아닌데 천지 만물을 다 하고, 모든 것이 아니면서 모든 것을 다 한다. 그게 진여법신이고 그게 극락세계거든요. 그리 가시는 거예요. 그걸 이제 글자로 표현하면 물형일념(勿形一念)이, 말라는 아니다, 말 물자가 있고 형상 물자가 있는데, 형상 아닌 일념이, 한 생각이, 한 생각이라는 건 이 생각 저 생각이 아니라, 생각 일으키기 이전의 생각도 한 생각이라고 하고, 요걸 딱 보는 그 감각의 생각도 한 생각이라고 그러는데, 이거는 생각을 일으키기 이전에 그 본래심도 한 생각이에요. 그러니까 형상이 아닌 본래 한 생각이 영명성각(靈明性覺)이라, 신령스럽게 밝고 본성이 스스로 안다, 이걸 성각이라고 하거든요. 본성이라는 성자, 느낄 각자, 영명성각이라고 깨달은 분들의 가르침인데요. 영명성각. 영명성각이 신령스럽게 밝아요. 찾아보면 없어, 근데 별별거 다 보고 다 들어요. 그런데 이것이 불가사의 해탈경계(不可思議 解脫境界)라. 생각할 수 없는, 해탈이라는 것은 이장(雉障)이라고 장애에서 벗어나는 거. 벗어날 이자, 장애 장자, 이장. 열반은 본래 불생불멸을 열반이라고 하고, 해탈은 생로병사의 모든 근심 걱정에 장애가 있었는데 거기서 벗어나는 걸 해탈이라고 그래요. 본래열반, 이장해탈(雉障解脫) 처음에는 깨닫기 전에는 근심 걱정이 많고 무슨 여러 가지 속박과 장애가 많았는데, 이걸 깨닫고 나니까 근심 걱정 속박 장애에서 다 벗어났다, 그걸 해탈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영명성각의 본래 신성이 불가사의 해탈경계라, 생각할 수 없는 해탈경계다. 그럼 그 경계가 어떠하냐. 무상무애 적멸보궁(無相無礙 寂滅寶宮)이라. 적멸이라는 것은 생멸이 없다는 소리예요. 생멸이 없다는. 고요 적자, 멸할 멸자. 생멸 없는 그 세계에 무한한 공덕이 있다. 그걸 보궁이라고 하거든요. 적멸보궁. 적멸보궁이 왜 적멸보궁이냐면 무상무애, 이게 불가사의 해탈경계인데, 일체제불이 깨달은 경지를 가르침으로 표현하자면 무상무애라. 무상이라고 하는 건 없을 무자, 상이라고 하는 형상 상, 서로 상자, 그 상자를 써서 무상이라고 그러는데, 깨닫기 전에는 상에 상이 있었는데 깨닫고 보니까 상에 상이 없다. 이게 깨닫기 전에는 상을 상으로 보고, 상에 집착을 했어요. 딱 본래 영명성각이 열리는 순간에 상에 상이 없다는 걸 깨달아요. 왜 그러냐. 이게 다 인연으로 생겼기 때문에 자상이 없다는 거예요. 이게 자상이. 자체상이 없다는 거예요, 인연상이기 때문에. 일체상은 인연상이요, 자체상이 없다. 이 마음이 탁 고요에서 열리는 순간에 모든 상은 인연상이요, 자체상이 없다, 이걸 보게 돼요. 시계는 시계의 자체상이 없고, 여러 가지 부품이 모여서 이제 인연상이란 말이죠. 이 상에 비해서 근심 걱정이 있는 거예요. 이 몸도 자체상이 없어요. 인연상이에요. 여러 가지 모여서 몸이 된 거지 이거 자체 상이 없어요. 무상. 그래서 모든 상에서 벗어나게 돼요. 하늘에도 하늘 자체상이 없고요, 땅에도 땅 자체상이 없어요. 이걸 통달무상이라고 그러는데, 무상을 통달해요. 그게 깨달음이에요. 지옥에도 지옥 자체상이 없고 세간에도 세간 자체상이 없어서 인연 따라 생겼다, 인연따라 사라져요. 그래서 형상에 집착하는 건 다 어리석은 고통이에요. 요즘 방송에서도 그런 얘기하데요. 재미있는 얘기. 좋아한다, 사랑한다, 집착한다, 원수 됐다, 이게 딱 돌아가는 과정이에요. 좋아하고 사랑하고 집착하고 원수되고. 세상사가 다 이렇게 돌아가요. 지금 원수 된 사람이 다 좋아하던 사람이지, 안 좋아한 사람이 누가 원수가 돼요. 그럼 그 이유는 뭐냐. 상에 자체상이 없다는 걸 모르고 다 이 형상에 집착하는 미혹으로 생긴 거거든요. 이게 통달무상을 하면 상에 상이 없어요. 그러니까 무애가 돼요. 큰 것도 자체상이 없고 작은 것도 자체상이 없으니까 이게 하나도 장애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고, 저 가는 티끌에 시방을 다 포함한다고 그러잖아요. 그게 왜 가능하냐면 무상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가는 티끌에도 자체상이 없고, 시방 허공도 자체상이 없어서, 상 없는 것이 상 없는 데 들어가는 게 장애가 없단 말이죠. 그러니까 일 찰나가 무량겁이고 무량겁이 일 찰나고, 일 찰나도 자체상이 없고 무량겁도 자체상이 없어요. 이거 장애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이걸 깨달은 분을 삼세제불이라고 그래요. 과거 현재 미래 모든 부처님들이다. 그분들이 머무는 곳이 극락세계에요. 그래서 무상무애 적멸보궁이라. 적멸이라는 건 무상무애란 말이에요. 무상무애. 무상무애한데 없는 게 없어요. 무진장 보배궁전이에요. 그걸 적멸보궁이라고 하거든요. 佛放光明遍世間 照耀十方諸國土 불방광명변세간하니 조요시방제국토라演不思議廣大法 永破衆生凝惑暗 연부사의광대법하야 영파중생치혹암이로다(華嚴經제2권, 世主妙嚴品)(화엄경제2권, 세주묘엄품)나무아미타불 이 법문은 화엄경 제2권 세주묘엄품에 수록된 법문인데, 부처님이 뭐 하는 분이냐. 영명성각 적멸보궁, 이 대광명을 항상 비춰서, 상에 상이 없는 줄 모르고 상에 집착해서 근심 걱정하는 중생들을 깨우치는 게 부처님이다. 부처님이 할 일은 크게 없어요. 상에 상이 없는 줄을 모르고 상에 집착해서 좋아하고 사랑하고 집착하고 원수 되고 만날 이 모양을 되풀이하는 거를 생사유래라고 하거든요. 그런 치혹암, 그런 치혹암을 비춘다. 불방광명변세간하니(佛放光明遍世間), 부처님이 광명을 비추는 것이 세간에 두루하니, 시방제국토(十方諸國土)에 항상 밝게 비춘다. 연부사의광대법하야(演不思議廣大法), 불가사이한 광대법을 연설해서, 영파중생치혹암(永破衆生凝惑暗)이라, 중생의 어리석고 미혹한 어둠을 영원히 없애주신다, 이런 법문이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생로병사가 전부 상에 상이 없는 줄 모르고 상에 집착하는 고통이에요. 그러면 상에 상이 없는 줄을 알아, 무상법을 통달해서, 상에 자재하게 되면 그것이 적멸보궁이요, 그것이 극락세계라, 이걸 깨우치는 게 부처님이다. 이런 법문이거든요. 百福莊嚴 常樂淨土 백복장엄의 상락정토여壽光無量 極樂世界 수광무량의 극락세계라若人一念 願生樂刹 약인일념 원생낙찰하면剎那往生 受用無窮찰나에 왕생하여 수용이 무궁이로다나무아미타불 백복이 장엄(百福莊嚴)이라, 백복. 백복이라는 게 온갖 복덕을 백복이라고, 장엄이라는 건 다 갖춰져있다. 그러면 이 복이라는 게 뭐냐. 유가에서는 오복을 가르치고 불가에서는 만복을 가르치는데요. 오복, 만복. 그런데 만복이라는 게 뭔가 개념이 전혀 달라요. 유가에서는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 서경에 나오는 말씀인데, 불교는 만 가지 복덕이 있거든요. 불교는 선정을 복덕이라고 그래요, 선정을. 선정 복덕이라고. 왜 선정 복덕이냐. 뭐든지 마음이 딱 안정되면 그게 거기에요. 마음이 딱 집착하면 그게 화에요. 그러니까 하늘을 봐도 마음이 딱 안 잡히고. 땅을 봐도 마음이 딱 안 잡히고, 그게 하늘 보면 하늘 복이고 땅 보면 땅 복이요, 사람 보면 사람 복이고, 보는 것마다 복덕이란 말이죠, 선정이 되면. 그러니까 극락세계는 백복장엄이라, 모든 복덕으로 다 장엄이 돼 있다, 꾸며졌다 이거죠. 그래서 상락정토(常樂淨土)다. 항상 즐거운 청정토다. 수광무량(壽光無量)이라. 수명과 광명이 한량이 없다. 어둠이 없고 죽음이 없다는 거지요. 상에 집착하면 항상 공포가 따르는데 그 공포가 죽음에 대한 공포예요. 암흑에 대한 공포예요. 어두움을 싫어해요. 죽음을 싫어해요. 근데 상에 상이 없는 줄을 알면 죽음의 죽음이 없고 어두움의 어두움이 없기 때문에, 극락세계에요. 죽는 게 극락세계고, 어두운 게 극락세계인데, 상에 미혹하니까 공포를 느끼죠. 공포를 느끼면 고통이에요. 그래서 수광무량, 수명과 광명이 무량한 극락세계라. 그럼 어떻게 해야 되냐. 약인이 일념이(若人一念) 원생낙찰하니(願生樂刹), 낙찰은 즐거울 락자, 불찰이라는 찰자, 국토라는 말인데 즐거운 국토 극락세계에, 어떤 사람이 한 생각으로 극락세계에 나기를 원하면, 찰나왕생(剎那往生)하여 수용이 무궁이라(受用無窮), 찰나 순간에 극락세계에 왕생해서 그 극락세계에 백복장엄 상락정토의 낙을 수용하는 것이 한량이 없다. 이런 법문이거든요. 삼세제불은 뭘 봐도 상에 상이 없는 걸 보는데 상에 상이 없음을 깨달았다 이래서 깨달은 마음을 불심이라고 하고, 또 부처님을 공경한다 하는 것도 불심이고, 부처님을 공경하는 것도 불심이고, 깨달은 마음도 불심이에요. 그래서 깨달은 마음을 불심이라고 하는데 뭘 깨달은 마음이냐. 이 상에 상이 없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뭘 보든지 상에 상이 없는 걸 보기 때문에 염념 불심(念念佛心)이라고 그래요. 생각 생각이 다 깨달은 바다. 그게 부처님 마음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냐. 진진(塵塵)이 불국이라, 티끌 티끌이 다 부처님 나라다, 이게 극락세계에요. 티끌 진자, 진진. 부처님 불자, 나라 국자. 염념이 불심이니 진진이 불국이라. 범부 입장에서 보면 염념이 불심이면, 생각 생각이 깨달은 마음이면 진진이 불국이라, 티끌티끌이 부처님나라다. 부처님 입장에서는 염념이 불심이니, 생각 생각이 깨달은 마음이니 뭐든지 상에 상이 없어요. 그래서 어떤 걸 봐도 항상 정심현용이라, 고요한 마음이 나타나요. 어상에 무상하니, 상에 상이 없으니 정심이 현용이라, 고요한 마음이 나타난다. 진진이 불국이요. 하나하나 다 부처님 나라에요, 극락세계란 말이죠. 딱 한 마음으로 원생낙찰하면, 극락세계에 가기를 원하면, 마음으로 가는 거니까 차표 살 일도 없고 승용차 시동 걸 일도 없고 다리 움직일 일도 없고 한 털 끝도 움직이지 않고 바로 간다. 이거예요. 이걸 불가사의 왕생법이라고, 생각할 수 없이 극락세계 왕생하는 법이다. 금일영가 지심제청 지심제수今日靈駕 一念信心 금일영가 일념신심으로面見彌陀 往生樂刹면견미타하야 왕생낙찰하소서나무아미타불 두 마음은 근심 걱정의 마음이고 한 마음은 해탈경계의 마음인데, 근심 걱정은 해탈 경계, 근심 걱정은 한자로 쓰면 우비고뇌(憂悲苦惱)라고 그래요. 근심 우, 슬플 비. 괴로울 고, 번거로울 뇌, 우비고뇌. 근데 근심 걱정 없는 건 해탈경계다. 일념신심(一念信心)으로, 두 가지 생각 갖지 마시고, 세상도 좋으니까 집착하는 재미도 있거든요. 집착을 더 해 볼까. 또 극락세계가 있다 하니 극락세계도 가볼까, 이런 건 이게 두 가지 마음이에요. 집착은 끝이 없어요. 집착할 때는 뭐가 있는 것 같은데 지나고 보면 고통이에요. 이게 참 문제에요. 집착할 때는 재미가 있거든요. 그래서 집착해요. 근데 지나고 보면 괴로움이 와요. 집착하고 괴로워하고 집착하고 괴로워하고, 그냥 한 마음으로 딱 되면 바로 극락세계인데, 두 마음이 계속 산란하게 되면 이게 괴로움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마지막 법문이 금일 영가께서는 일념신심으로 한 생각 믿는 마음으로 면견미타하야(面見彌陀), 바로 면전에서 아미타불을 딱 친견을 해서 왕생 낙찰(往生樂刹)하소서. 극락세계에 왕생하소서.
-
[천일기도] 1월 16일 대웅전 천일기도 입재 법문
주지 계호스님 2022-01-16
안녕하세요. 오늘은 정말 좋은 날입니다. 여러분들이 발길 머무는 곳, 마음이 깃들어 있는 곳, 마음의 정원 진관사에 오신 오늘이 천일기도 입재날입니다. 저희 은사 스님이, 제가 몇 번 말씀드리는데, 63년도부터 오셔 가지고 대웅전, 명부전, 나한전 천일기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또 선행 스님이 이렇게 처음으로 기도에 입재했어요.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죠. 시작했다 하면 벌써 반쯤 가는 거예요. 또 오늘이 무슨 날이냐면은 불교에 십재일이 있거든요. 초하루날은 정광부처님이 주관하시고, 8일은 여러분들이 다 아시는 약사부처님이에요. 그다음에 14일은, 오늘이 14일입니다, 보현보살재일이에요. 보현행원품을 저희 스님은 평생 실천하셨어요. 보현보살은 실천의 보살이에요. 관세음보살은 자비의 보살이고, 지장보살은 비증보살이고. 십오일은 혹시 무슨 재일인지 아세요. 아미타재일, 미타재일이라 그러죠. 그리고 18일은 지장재일이고, 23일은 대세지보살, 24일은 다 아시죠, 관세음보살재일이고, 28일은 비로자나부처님이고 29일은 약왕보살이에요. 그다음에 30날은 석가모니부처님인데, 이렇게 십재일 가운데 보현보살 재일날에 입재를 하니까 너무 좋잖아요. 사람이 살아가면서, 기도는 내 안에 업장이라는 바이러스를 치유하는 백신이에요. 우리가 감기 들면은 감기약 먹고 치유하죠. 기도라는 거는 내 안에 있는 업장 소멸부터 돼야지 기도가 잘 되는 거예요. 그리고 기도는 치유고 정화에요. 내 몸을 정화해주는 거예요. 우리가 그냥 물 대신 정화수 떠다 놓고 기도 하시듯이, 몸의 정화를 시켜주는 건 기도밖에 없어요. 업장 소멸도 기도밖에 없고. 이렇게 시작하는 날 신도님들이랑 스님네들이랑 함께 동참하면서 같이 기도하는 게 이게 같이 공부하는 거예요. 세상에 혼자 공부하는 건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독살이하지 말라고 그러잖아요. 대중이 정진하고 대중이 공부시켜주는 거거든요. 그리고 선행 스님은 법명 그대로 선행이에요. 다 같이 큰 박수 한번 쳐주세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성과 간절함이 있고, 그다음에 친절함이 있는데, 간절함은 지혜예요. 친절은 자비에요. 물론 지혜는 밝음이고 자비는 맨날 따뜻함이라 그랬는데, 간절히 간절히 하다 보면은, 정성을 기울여서 하다 보면 그대로 지혜가 나오는 거예요. 그리고 친절하다 보면 자비가 되는 거지요. 자비에는 무적이라 그랬어요. 적이 없다고 그랬어요. 지혜는 번뇌 망상이 없다고 그랬거든요. 진실하게 정말 성실하게 하다 보니까 지혜가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데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살아지는 사람이 있고, 살아내는 사람이 있어요. 그럼 어떤 게 제일 좋겠어요. 물 흐르듯이 살아가는 게 최고 좋아요. 억지로 살아가려고 할 거 없고, 억지로 살아내려고 할 것도 없이. 그러니까 선행스님이 기도를 이제 시작하려고 하는데, 우리가 다 한 마음이 돼 가지고 도와주셔야 돼요. 그러니까 조력을 해주는 게 우리들의 역할이거든요. 그리고 믿음이라는 것은 몸과 마음에, 내 마음을 정화시키고, 내 마음에 믿음이 있어야지, 그게 참 믿음인 거예요. 밥 먹고 잠자고 하는 게 다 부처님이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말 하루도 기도하기 어려운데, 열흘, 7일, 3•7일, 한 달, 3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서 천일기도를 하는 동안에, 정말 선행스님이 기도 잘할 수 있게 도와줘야 되고, 청소도 좀 해드려야 되고, 같이 독경도 해야 되고요. 법화경 공덕이 얼마나 좋은지, 제가 읽어보니까, 그전에도 좀 독송을 했는데, 지금 새로 새로 또 느껴지더라고요. 자실인의(慈室忍衣)라고 있거든요. 자비의 방과 인욕의 옷, 그런 것이 다 법화경의 사상이거든요. 그리고 정작 정법의 자리에서 아상, 인상 이런 거 상이 없는 법공의 자리에 앉아가지고, 자비로운 생각, 인욕의 생각 이것만 가지고 있으면 최고의 기도에요. 그래서 제가 그전에 처음 와가지고 육비탕을 가르쳐줬는데, 육비탕의 첫째가 뭐냐 하면 신심이에요. 그다음에 두 번째가 묵언, 말을 많이 해서 좋은 건 없어요. 오죽하면 옛날에 침묵은 금이고 웅변은 뭐라 그랬어요. 은이라고 그랬죠. 그러니까 말도 할 때만 많이 하고 그렇게 막 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조금 조금씩 묵언하면서 그다음에 여유를 갖자. 마음의 편안함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복잡다단하면은 살아가는 게 복잡해져요. 그러니까 여유 있게 하고. 그다음에 아까 자비라고 그랬죠. 자비를 베풀면서 인내, 인욕하는 거예요. 자실인의 그게 그대로 법화경 사상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남이 뭐 이렇게 하는 거 보기 전에 내가 스스로 바른 마음, 바른 생각으로 믿으면은 그게 기도로 최고의 기도에요. 그러니까 사람은 기도를 열심히 하고 정진을 많이 하다 보면 남의 말 할 생각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열심히 하고 이렇게 추운 겨울에 보현보살재일날 천일 기도를 했으니까 잘 마지막 회향하도록 우리가 도와드려야 되겠죠. 마음으로 약속하시면서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감사합니다. 기도 성취하십시다, 다 같이.